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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시 소설 에세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나는 남잔데, 축구하라고 강요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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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생이 대학생 남자 선배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로 1순위는 군대에서 축구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더 이상 글자를 늘리기 아까울 정도로 많은 여자들이 축구 이야기를 싫어한다. 게다가 오프사이드, 스로인, 파울, 그리고 축구선수 이야기로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난 남잔데 축구를 정말로 싫어한다. 초등학생 때 운동 좀 좋아해 보려고 축구화 사달라고 부모님께 조른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축구할 때면 깍두기처럼 수비만 했는데(수비가 나쁘다는 거 아님), 축구화를 신은 날도, 안 신은 날도 깍두기를 면치 못해서 그 뒤로 축구화는 들고 다니지 않았다. 주말에 혼자 아파트 단지 앞에서 드리블을 하다가 축구화 뽕은 아스팔트에 다 닳았고, 이게 왜 축구할 때 좋은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축구를 영영 싫어하게 됐다. 공격수인 그들은 골대에서 환호했고, 나는 피구와 발야구를 했다. 그마저도 인원이 많으면 운동장에 앉아 모래성 쌓거나 돌을 만졌다. 그때부터 다들 공 차러 갈 때 나는 소설을 읽었다.

축구는 남자의 뒷덜미를 잡는다. 고등학생 때는 팀원이 부족한 상대팀에 스파이로 끌려나가 원하지 않는 수비수를 하기도 했고, 대학생 체육대회 때도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투입됐다.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는 연마다 체육대회로 남자는 축구, 여자는 응원을 한다. 직장 축구 대회에서 선수들은 항상 부상을 당했는데, 나는 '축구 같은 거 할 줄도 모르고, 볼 줄도 모릅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축구 같은 거 정말 질색이다.

지금 와서 왜 축구가 싫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공을 차고 싶어도 실력이 없으면 한 번도 못 차거나, 포지션이 구리면 서 있는 자리에서 욕을 먹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기 싫다고 내가 말했잖아요. 축구에 축 자도 싫고, 축구라면 축구장에 잡초도 싫어요. 제발 축구는 니들끼리 하세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저자 김혼비

출판 민음사

발매 2018.06.08.

"스포츠에 급하고 안 급하고는 없습니다. 빠르고 안 빠르고만이 있을 뿐." 을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 같은 톤으로 일축하는 것을 시작으로, 뭔가 질문을 던지면 이분 참 별걸 다 물으시네 하고 말하는 듯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꾸 일단 와 보라고만 했다.

학창시절 틈만나면 운동장에서 뛰고 수돗물에 머리를 적셨던 저자는, 축구를 할 수 있는 곳을 알고 싶었다. 2년 검색 끝에 축구클럽 모집공고를 보게됐고, 전화했고, 축구 양말에 태그를 땔까 말까, 내가 계속할 수 있을까 없을까를 고민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운동장에 간다.

여성 대부분은 나이를 먹으면서 축구를 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알게 된다. 근육량이 다르고 민첩함이 다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기어코 축구를 하겠다는 여성들은 이유가 뭘까. 그래도 김혼비는 특정한 선수의 화려한 발놀림과 축구에 대한 열정적인 애정이 있었다. 그러나 축구클럽 회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A 언니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오며 가며 얼굴만 아는 할아버지가 대뜸 말을 걸었다고 한다. 가끔 연습 시합을 하는 친한 여자 축구팀에 사람이 모자란다. 그동안 당신 운동하는 걸 쭉 지켜보니 보통 체력과 운동신경이 아니더라. 한번 나와서 같이 뛰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 B 언니는 A언니가 연예인 길거리 캐스팅처럼 할아버지에게 스카우트되던 순간에 바로 옆에 있었던 사람인데 "넌 귀가 얇아서 이상한 단체에 잘못 엮여 들어갈 위험이 크니 내가 같이 가 주겠다."라며 A 언니와 동행, 얼결에 시합을 뛰고, 같이 입단했고, 같이 8년 동안 뛰었다.

그 밖에도 어린이 축구 교실에 아들을 보내려다 감독에 꾀에 넘어가 자신이 축구하는 엄마, 그 엄마를 비웃다가 입단한 다른 엄마, 그 다른 엄마에 꾐에 넘어간 또 다른 엄마, 하체 살 빼는 건 축구가 최고라는 구남친에게 속아서 지금까지 축구하는 사람, 머릿수 채우다가 입단한 사람 등. 기구하고도 괴상한, 다단계 같은 축구 클럽이었다. 그러니 축구 규칙도 몰랐고, 좋아하는 선수도 없었으며, K리그는 커녕 월드컵도 제대로 챙겨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터무니없는 이유로 잡혔으면서 그녀들은 왜 떠나지 않고 축구를 하는가.

그녀들의 축구 클럽은 남다르다. 꼴뵈기 싫은 멘스플레인을 강력히 누르며, 못한다고 팀원을 깔보거나 훈계하지 않고, 공을 덜 주는 건 있어도 기죽게 하진 않는다. 그냥 와보면 알게 된다는 감독의 말은 보는 사람도 터무니없었지만, 다시 보니 이만한 설명도 없었다.

나이를 불문한 끈끈한 우정, 라이벌을 이기겠다는 목표, 부상을 당하면 모두가 일어나 걱정하는 뜨거운 눈시울, 쌈닭같이 싸워도 하루 지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빛을 교환하며 믿고 패스하는 인성. 내가 여태껏 알아왔던 축구와는 다른 축구였다. 바로 그들이 축구를 하는 이유였다. 정말로 그녀들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축구는 하기 싫고, 억지로 끌려나가면 끌고 간 사람과 절교할 것이다. 하지만 김혼비는 응원할 것이다. 끈끈한 여자축구도 응원할 것이다.

끝으로 김혼비의 글은, 문학적 드립이랄까. 중간중간 폭소폭탄이 숨겨져있는데, 읽는 사람은 웃음 참다가 옆에 있는 물컵 조심해라.

어쩌다 살이 붙어 체중계 앞자리 숫자라도 바뀌면 마치 세상이 바뀐 것처럼 굴었는데,(...) 재판은 언제나 엄청난 죄책감과 함께 '엄격한 금식'이라는 형벌을 내렸고, 금식 기간 동안 몸을 허기로 몰아 넣은 채 상추 잎새에 이는 고기 굽는 냄새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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