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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시 소설 에세이

정세랑은 항상 독자의 상상력을 부순다. < 보건교사 안은영 / 옥상에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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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

 

내가 정세랑의 소설을 읽어본 것은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부터였다. 딱히 그 제목으로 끌려서 읽었던 것은 아니라고 솔직하게 밝혀둔다. 믿고 본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작가를 믿었던 것도 아니오. 표지를 믿었던 것도 아니오. 민음사에서 출간된 시리즈 [오늘의 젊은 작가]에 시리즈가 엉켜 그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민음사가 묶은 두툼한 양장본 [오늘의 젊은 작가]시리즈는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 임성순의 <자기 계발의 정석>, 김중혁의 <나는 농담이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김혜진 <딸의 대하여>등. 수많은 젊은 작가의 장편소설을 실은 시리즈다. 근래 계속 출판하고 있는 책들도 대충 훑어보니 그 깊이가 얕고, 읽는데 거북함이 없어 내게 계속해서 좋은 이미지로만 각인되고 있다. 소설책을 좋아하는 사람 대부분 이 시리즈 중에 <82년생 김지영>으로 출발하는 사람들 꽤 많았고, <딸의 대하여>를 두번째로, <한국이 싫어서>로 장강명을 알게되어 차례차례 독파해나가는 사람들 또한 꽤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보건교사 안은영 / 민음사

 

<보건교사 안은영>은 그 직업부터가 '보건교사'여서 중학교이건 고등학교이건 학교 안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되고 그 주인공을 토닥여주면서 일련에 감정들을 느끼는 안은영의 감성충만 현실 소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별개로, 이건 본격 퇴마 학원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그 이름을 학창시절 친구들이 '아는 형'이라고 놀렸다는 데에서 첫번째로 마시던 콜라를 뿜었는데, 아는 형 답게 늘 가방 속에 비비탄 총과 깔대기 모양에 장난감 칼을 소지하고 있었다는데 또 킥킥킥 웃어버렸다. 보건교사 주제에 문방구 레트로 따위 취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걸 바로 키덜트라고 하지 않는가 생각했지만, 사실 안은영은 죽은 사람의 혼을 보는 퇴마사였는데 그 장난감들로 혼을 달래주고 주변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슨 개떡같은 설정인가 싶은데 또 그게 인상을 찌푸리는 쪽이 아니고 계속 콜라를 뿜어버릴까봐 콜라잔을 못잡는 상황이어서 이거마저 다 읽고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이었던 것이다. 

옥상에서 만나요 / 창비

빵빵터져버린 내 배꼽을 다시 확인하며 이번에 들은 책은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의 소설집이다. 소설'집'은 다들 알겠지만 장편소설이 아니라 단편을 묶은 것. 하여 <옥상에서 만나요>는 가운데 즈음을 펼치면 바로 만나볼 수 있는데. 그 단편 하나가 페이지를 넘기기 너무 아까워 살금살금 읽다가 마침내 책을 다 읽고 접어버린 소설이라 하겠다. 

 

"너 나랑 내 러시아 여자친구랑 한번 안 만날래?"

주인공에게 대놓고 쓰리섬을 제안하는 미친 갑질 회사 상사. 주인공은 스포츠신문 광고사업부 막내이며, 그런 제안을 한 것은 상사였다. 볼래 이런거라며 환영회때는 룸살롱에도 다니고 온갖 추악한 밤문화를 회식빙자해서 상사들이 주선했나본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은 머리를 스포츠머리보다 조금은 길게 잘라내고 양복을 갖춰 입으며 나름에 자아를 굳건히 한다,지만 오히려 상사들은 남자같다며 더 욕지거리를 하거나 업무를 전가할 뿐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회사 생활이 지옥같다면 그래도 주변 사람중 기댈 사람 한 명쯤 만나게 된다고, 주인공은 마녀같은 세 명의 언니들을 회사에서 만나게 되고 퇴근하면 같이 문화생활 명목으로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고 밤늦게 귀가하는 일상을 즐긴다. 그때만이 주인공은 오로지 '나'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런 손톱만큼에 수다 떨고 회사다니는 맛에 살다가 갑자기 마녀 언니들 세 명이 연달아 결혼을 하는데. 주인공은 언니들의 결혼에 마음이 비참해진다. 더 이상 언니들은 수다 떨 시간이 없으며, 자신은 기댈 곳도 없다지만. 명희언니가 90년대 뚜꺼운 가죽점퍼를 입은 형사 아저씨를 데려와 결혼을 했고, 소연언니는 400쯤 친다는 준 프로급 당구돌이를 데려와 결혼을 했고, 예진언니는 전통악기를 만든다는 장구돌이를 데려와 결혼을 했는데, 대체 이게 무슨 사태인가 싶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첫번째와 두번째만남은 그렇다쳐도. 도무지 전통악기를 만든다는 장구돌이는 어디서 썸을타서 만나게 되었냐는 것인데.

 

사실 그녀들이 뜬금없이 결혼해서 또 불화없이 잘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규중조녀비서>라는 책을 동대문 헌책방에서 우연히 보게된 뒤였다. 나중에 언니 세명이 진짜 마녀처럼 주인공에게 다가와 "너 진짜 결혼하고 싶어?"라고 묻는데. 도무지 어떻게 된 것인지 눈을 말똥말똥하게 쳐다보며 "넨네 언니" 하니까 종이가 닳고 닳아서 파삭파삭한 고대도서를 하나 내밀더란 것이다. 거기엔 마법주문이 가득했고, 언니들은 이것을 스펠(Spell)이라 불렀다. 주문을 외워서 남자를 만들어 결혼했다는 것.

 


 

이런 이야기가 <옥상에서 만나요> 라는 책 제목과 어울리는가. 어울린다고 말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나는 이 제목으로 이렇게 기막힌 판타지 소설을 찾지 못했다. 뻔한 이야기를 독자들은 제목에서부터 상상하는 힘이 있는데, 그런 일말에 상상력을 모조리 부숴버리는 것 같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은 대체로. 그러니까 제목과는 다른 이색적인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손에 쥘 만 하다. 어어어 내가 원했던 것은 이런게 아닌데 하다가 소설이 끝나버리고 마니까, 시간 좀 넉넉하게 읽길 바란다. 정세랑의 책을 잡으면 세 시간이 금방이다.

 

넷플릭스 개봉예정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출연인. 정유미 / 남주혁

 

아참. <보건교사 안은영>은 2020년 올해 넷플릭스 개봉 예정이라고 한다. 정유미와 남주혁이 나온다고 한다. 기대되지 않는다. 소설만큼 빼어난 드라마가 나올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정관념은 없지만 소설이 매우 위트있는 솜씨로 풀려있어서 드라마가 흥행하지 못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 중에서.

<옥상에서 만나요>의 책 표지는 <며느라기> 웹툰으로 유명한 수신지 작가가 그렸다. 동글동글한 그림체가 정세랑의 소설과 컨셉이 잘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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