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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시 소설 에세이

사적인 서점 정지혜의 덕질. 방탄이 우릴 구할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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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뻤던 적

내가 가장 기뻤던 적을 떠올려본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군대 제대하는 날 정오가 가장 기뻤던 것 같다. 이등병 작데기 달기도 어려웠던 지난한 훈련병 생활을 시작으로 말년병장에 지루하고 긴 시간의 터널을 거쳐 동기들과 전역을 외치고 고향으로 가는 기차에서 다디단 잠을 자고. 집 앞으로 갔을 때 나를 마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은 전부 야시장에 나가 일하셨기 때문에 나를 돌볼 틈이 없었다. 되레 내가 행사장에 가서 도와야 할 판인데, 나는 그냥 집으로 왔다. 아무도 없는 방에 군용 배낭을 팽게 치고 군복을 벗지도 않은 채 누웠을 때 너무나도 행복했다. 초중고 학업생활을 기숙사에서, 대학교 생활도 하숙 생활을, 그리고 군대까지. 모든 것이 나를 속박하는 점호시간과 취침시간과 기상시간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순간들로 20대 초반이 되어서야 진정으로 해방되었다는 생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냉동고에 있는 고향만두를 한 봉지 다 털어서 군만두를 구워 먹고 다시 잠들었다. 그때가 가장 기분이 좋았다. 결혼보다도, 누군가에게 사랑 고백을 해서 성공했을 때 보다도, 시험에 합격하거나 취직에 성공했을 때도, 수능이 끝났을 때도 나는, 이때보다 기분이 좋진 않았던 것 같다. 

 

오늘 기뻤던 순간은?

오늘은 그저 아이와 노느라 바빴고, 아이가 낮잠잘때 미역국을 끓였고, 하루 종일 밀린 일을 하느라 진이 빠졌다. 지난 주말엔 책장을 뒤엎는 바람에 안방은 난장판이고. 그나마 기분이 좋았던 것은 아이가 내가 해준 쇠고기 미역국을 맛있게 먹어줄 때였다. 반찬 투정이 심한 4살 아들은 흔히들 하듯 수저에 밥을 얹고 비행기를 태워줘야 (비행기 날아갑니다 입을 벌리세요) 밥을 먹는데, 오늘만큼은 잘 먹어줬다. 설거지할 때 웃었다. 오늘 그것이 가장 기뻤다.

 

 

사적인 서점 정지혜 대표

 

사적인서점 정지혜 대표와 그녀의 책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한 사람만을 위한 서점)

<사적인 서점>이라고 알고 있는가. 이 서점에서는 상담 예약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정지혜 대표를 찾아가 상담을 하면 그녀가 상담에 귀를 기울여주고 내 관심과 취향에 맞는 책을 배송해주는 작업을 한다. 그러니까, 한 사람만을 위한 큐레이션을 하는 '책 처방사'인 것이다. 마음에 상처를 받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거나, 기타 다른 심리치유가 필요한 사람도 이 서점에 가면 자신의 취향에 맞는, 혹은 자신이 흥미로워할 책을 골라준다. 

한참 인기가 있을땐 두 달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정지혜 대표의 사적인서점은 인기가 있었다. 그녀만이 유명세가 아니었다. 그녀의 콘셉트가 문학잡지에도 소개되었고, 코엑스에서 열리는 출판전에도 정지혜 대표가 부스를 차려 약국의 모티브로 책을 처방하는 모양새로 상당히 인기를 끌었었다. 

 

두번째 책.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

 

그러던 어느날 정지혜 대표는 사적인 서점에 문을 닫고 해외로 여행을 떠난다. 계속되는 상담으로 인해 마음이 다치고, 심리가 불안했던 것이다. 역시 아무리 멘털이 탄탄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일까. 더 이상 서점을 못 열 줄 알았음에도. 그녀가 마음을 치유한 것은 뜻밖에. '아이돌 덕질'이었다. 서점을 닫고 무기력한 나날의 연속이었던 그녀가 갑자기 좋아하는 것을 찾고 '열렬히 좋아하는 대상'이 생기면서 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비로소,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방법'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방탄소년단을 따라다니면서 말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책을 꼽은 것중 하나가 재미있어 소개해보고자 한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소설은 단편으로 추려낸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은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다 읽으면 장편이 되는 형식이다. 이 소설에서는 '인생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으로 구성되어있는 것 같다.'고 한다. 결혼이나 출산은 매우 큰 행복이고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지만 사실 그 행복 안에는 자잘한 불행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는 작은 기쁨도 필요하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작은 기쁨이란 던킨도너츠 직원에 따뜻한 말 한마디와 편안하게 쉬면서 맛있는 거 먹으면 좋을 것 같은, 그런 아주 작고 소소한 행복이다.

 

기쁨을 비교할 수 있을까

 

사적인 서점에서 상담중인 정지혜 대표

그렇다면 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과, 오늘을 지내며 기뻤던 순간을 비교할 수 있을까. 비교가능한 크기일까. 아주 큰 행복들 속에 자잘한 불행들이 있고. 자잘한 불행을 견뎌내는 소소한 행복이 있었다. 그 어느 것도 먼저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당신이 기뻤던 순간은 언제인가. 당신에겐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 어느 때에 취향이 있었는가. 먹고살기 바빠서 취향을 잃어버리진 않았는가. 지하철에서 유튜브를 보는 것도, 짜장면이 아닌 볶음밥을 좋아하는 것도, 문구점에서 만년필을 사는 것도, 당신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 좋아하는 마음들은 우리를 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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