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프랜차이즈 커피숍 공차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SNS에서 '공차 언니가 알려주는 공차 꿀팁 레시피' 라는 인기 게시물이 있었는데, 읽어보지 않고 지나간 기억이 있다.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으려고. 어차피 나는 공차에 다니고 있고, 레시피도 다 알고 있으며, 내 입맛에 맞는 차는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차(블랙, 얼그레이, 그린, 우롱)를 고르고, 우유를 넣거나, 타피오카를 넣거나, 알로에를 넣거나, 다양하게 섞고 올려 마시는 복잡한 방식들 중에서. 내가 원하는 음료를 찾는 것은 행복이었다. 요즘은 좀 더 다양하게 메뉴가 나오는 것 같은데, 좀처럼 이색적이지 못해 보인다. 암튼 그때는 행복했고. 나는 종종, 여유 있던 그 시절에 했으면 좋을 아르바이트를 상상한다. 서브웨이나 쌀국수 전문점에서 이색적이고 다양한 음식을 접했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고.
공차 시절에, 아침 일과는 차를 끓이고 타피오카를 데치는 일이었다. 가장 많이 나가는 블랙티는 두 봉지를 탈탈 털어 부었고, 얼그레이 티는 반봉지, 그린티는 반의반 봉지, 우롱 티는 두 수저. 우롱 티는 하루에 2잔이면 많이 나갔다. 4시간이 지나면 끓여놓은 티를 전부 버리는 규칙이 있어 그마저도 얼마 안 되는 우롱은 죄다 버렸던 기억이 있다. 가장 많은 양의 블랙티는 항상 부족해서 추가로 끓여야 했다. 지금은 그럴지 모르겠지만, 블랙티는 항상 뜨거웠고, 그린티와 우롱 티는 항상 식어있었다.
최근 우롱에 집착하게 된 건 무인양품 우롱차와, 고독한 미식가에 마츠시게 유타카가 고집하는 우롱차 때문이다.
반듯하게 짜인 무인양품 스타일(?)을 와이프는 참 좋아했고, 매장에 가면 꼭 생활소품을 한 두 개씩 사는 편이었다. 그릇, 그물망, 건조대, 잠옷, 국자... 사실 처음엔 다이소가서 사면 될걸 몇 배나 곱해서 사야 할 이런 물건들을 결제하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요리를 직접 해보니 생활의 질이 달라진 것 같아 요즘은 환영하며 결제한다. 그중에서 와이프는 우롱차를 꼭 한 병 샀는데, 딱히 다른 이유는 없는 것 같았다. 덩달아 마실 때 나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그날은 유독 피곤했을까. 한 모금 마셔보니 마치 숲 속이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노을 진 언덕을 와이프와 손잡고 걸으며 하늬바람을 느끼는 맛이랄까. 또 아니면 노인이 되어 홀로 그네를 타고 할 일없이 돌아오는 쓸쓸한 발걸음의 맛이랄까. 그도 아니면 때 묻고 빽빽한 일본의 빌라들 귀퉁이를 지나는 맛이랄까.
마츠시카 유타카가 마시는 우롱차의 느낌은 또 다르다. 키 180cm가 넘는 거구인데, 먹는 건 엄청 잘 먹으면서 살은 안 찌고. 이래저래 호감 가는데(이게 호감인가...), 더 호감은 극 중에서는 술이나 담배를 못하는 캐릭터라고. 술집에서 닭꼬치에 시원한 우롱차를 부탁하는 것이 소신 있는 멋쟁이 같았으며, 질러보자는 마음으로 안주만 엄청 시켜먹는 게 멋쟁이를 떠나 어떤 상남자의 구석이 보였고, 얼음이 가득 들어간 500ml 잔에 양주 색깔 우롱차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모습을 보자니, 바로 이 느낌이 이 남자의 '우롱차 느낌'이었다. 그때껏 먹었던 느끼한 닭껍질이 한꺼번에 달래지는 듯했다. 거구 유타카는 항상 음식점을 드나들 때 고개를 숙여 출입하는데, 고개 숙여 나와 어둠 속에 거리로 걸어가는 모습도 어쩐지 멋있어서 한동안 마음이 우롱우롱 우롱우롱, 머릿속에 우롱 생각만 가득했다.
몇 달 전부터 무인양품에서 우롱차를 팔지 않았다. 이틀 전에 찾아갔을 땐, '애플 우롱차'로 신제품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뒷 맛이 사과향의 깔끔함으로 덮여있는 새로운 우롱차였다. 우리는 우롱차를 조금씩 홀짝이며, 저녁엔 집에서 고추잡채를 해 먹었다. 내가 처음 해봤던 요리를 아내는 엄청나게 잘 먹어줬고, 우롱차를 마저 마시면서 말했다.
"여보. 나는 말야. 여보가 이 고추잡채를 엄청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어떤 느낌이냐면, 누군가가 '아 남편이 요리를 잘하시나 봐요. 어떤 요리를 가장 잘하세요?'라는 질문에, 음~ 고추잡채요.라고 말할 만큼 여보가 이 요리를 자주 하고, 또 잘했으면 좋겠어. 오늘 잘 먹었다."
나도 남아있는 우롱차를 마셨다. 우롱차는 마시면 마실수록 그 순간마다 추억이 된다.
우롱차는 추억을 더듬는 음료다.
우롱차를 입에 머금고 숨을 들이켜보자.
주마등이 스칠 것이다.
우롱차 얏빠리 스바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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