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에 세상을 떠난 지로 다니구치, 그가 하늘나라로 떠나기 전에 인문학자 브누아 페터스가 오랜 기간 동안 토의한 내용을 만화와 함께 3주기에 맞춰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일본 만화 최초로 앙굴렘 만화 페스티벌에서 두 차례나 수상되었던 지로 다니구치. 이 책 <그림 그리는 사람>에서는 40년 동안 발표한 작품들의 과정을 디테일하게 짚습니다. 만화의 발상. 기획, 그리고 시대 배경, 화면 구성 대사와 지문의 배치, 인물 설정과 배경. 심지어 만화를 그리기 위해 의성어 그래픽 삽입 방식이나 조언을 수하며 일하는 방식까지. 어쩌면 지극히 사소할만하다 싶을 그의 내용들이 창작으로서 발산되었다는 이 과정들의 책을 보면. 다니구치 지로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실제적이고 고급스러운 만화 창작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만화를 좋아하고, 그리기를 지향하고, 만화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추천할 도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다니구치 지로가 삶을 살아가면서 작게나마 깨달은 행복과 성찰들은 읽는 내내 감동으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앙굴렘에서 <열네 살> 이란 작품으로 상을 받을 당시 만화인들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유명한 작고도 아니었으며, 미국에서는 애초에 일본 만화를 엄청 무시하고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로 다니구치는 2년 뒤에 앙굴렘에서 또 상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작품으로 인정받은 다니구치. 마치 봉준호 감독이 생각나는 타이밍이기도 하며. 책을 좋아하는 분들에겐 김영하 작가가 생각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은 여러 나라로 번역되고, <열네 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 됩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라났지만, 만화가의 꿈을 키우고 싶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도교로 올라가 유명한 만화가의 조수로 경력을 쌓았다고 합니다. 만화가 지망생 이후 그의 삶은 어떻게 펼쳐졌는지, 또 앙굴렘 시상 이후 어떻게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는지, 평생 만화밖에 몰랐던 그의 열정이 어떤 식으로 이렇게 불잉걸처럼 오랫동안 타오를 수 있었는지 이 도서 한 권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감동적이며, 흥분이 가시지 않습니다.
만화책에 대한 실용서는 시중에 정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일전에 서점에서 일하면서 정말 별의별 책을 다 봤다고 써봤는데, 그 중에 만화 작법에 대한 책도 속합니다. 키스하는 장면, 포즈 잡는 장면, 스포츠 관련 스케치, 심지어 침대 위에 포즈를 설명하는 다각적인(?) 포즈 실제 설명 책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 프로그램과 어플을 통해 그리는 웹툰이 대세인 요즘은, 연필이나 붓과 펜으로 인물과 배경을 그리고 칸을 나누고 채우던 전통방식을 포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웹툰이 때로는 영화로도 탄생하면서 이런 유행은 더욱 두드러지기도 하죠. 가깝게 이태원 클래스가 그렇고요. 하지만 이런 전통방식 기저에 숨어 있는 복잡한 과정은 결코 '옛날' '고리타분' '꼰대' '정통'이라는 수식어에 들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물, 권투, 음식, 등산, 괴물 등등. 온갖 장르의 대중적인 작품은 물론이고, 역사, 문학, 철학의 만화가 이런 전통적인 수렵 과정을 통해 다니구치의 손에서 나왔으니까요. 대담자이자 저자인 브누아 페터스는 질문하고 지로 다니구치는 답변하는 방식의 이 대담집은,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을 살펴보고 그 작품들의 기획, 핵심 주제, 서사 구조, 시나리오를 옮기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세우기 위한 원칙들까지 비밀의 실을 풀어가듯 서서히 공개합니다.
아마도 제가 흥분해서 타이핑을 멈추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감흥이 사그라들지 않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토록 정교한 만화를 그리고 또 위상까지 높아진 그는 실제로 삶에 대해 굉장히 겸손하고 진솔했다고 합니다. 다니구치 지로는 당대 유명 만화가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할 때에 만화 한 가지만 바라봤던 자신을 반성하고, 꾸준히 활동적으로 움직이며 조사에 대한 탐문과 스케치를 지속했다고 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삶을 천천히 바라보기도 하며, 조용한 회상을 통해 많은 것을 발견하고, 또 깨어있는 어느 때엔 새롭게 도전하며 창작하는 열정을 일상처럼 누리고자 했다고 합니다.
브누아 페터스 : 만약 알라딘 렘프를 갖고 있고 지니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면 뭐라고 말할 것입니까?
다니구치 지로 :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으니까요. 저는 운이 좋았다고 단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즐거움 때문에 제가 계속 작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엄청난 성공을 원하지 않아요. 저는 이미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 인정 받았어요. 겸손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습니다. 성공에 집착하지 않고 되도록이면 자유롭게 작업하고 싶습니다. 제겐 운명을 바꾸는 것보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2018년에 JTBC 문화초대석에 출연해 손석희 앵커에게 인터뷰를 받으며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세계에서 가장 인정받는 상을 받은 뒤 소감이 어떻냐고 묻자. 드디어 올라갈 일이 없다. 무엇을 목표로 하는 연주는 이제 끝난 것 같다. 그저 연주를 즐기고 싶을 뿐이다. 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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