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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산문 수필 비문학

그림책은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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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저는 너무 많은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아니, 근래가 아니라 정확히는 작년에 이사한 후 부터 입니다. 더 넓은 평수로 전세로 이사와서, 아내가 월급의 1/3을 거의 그림책을 사는데 쏟아부었기 때문입니다. 그림책 전집을 수없이 뜯었습니다. 아내가 출근하면 여지없이 집앞에 택배가 도착했고, 무거운 하드커버의 전집류를 보자면 한숨도 나왔습니다. 아이도 맨 처음엔 그게 좋은건줄 몰랐으나, 제가 계속 읽어주니까 나중에는 책 박스만 뜯어도 ‘선물이야?’라며 제게 가까이 오기도 했습니다.

왜 이렇게 출판사가 다양한거야.

프뢰벨, 상상놀이,웅진, 위즈덤, 고릴라박스, 키즈엠, 스콜라, 그리고 케릭터로 모으자면 까이유, 추피, 메이지, 넘버블럭스, 등등 집이 책방으로 변하려고 합니다. 아내와 저는 같이 서점에 다니면서 눈이 맞았고, 서로 연애하면서도 책으로 연애했습니다. 집을 합칠때도 책을 정리하면서 싸웠고, 거의 정리할때쯤 다시 책이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거의 1천권쯤 정리를 하고 이제 좀 살림살이 나아진 줄 알았는데. 아이의 책이 2~3천권으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출판사는 많고, 다양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원서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책이라도 팝업, 외서, 하드보드, 소프트커버, 종류별로 나온 책도 소지하고 있었고. 굿즈로 케릭터가 만들어진 인형도 갖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책 덕후가 아닌데, 저희가 아이를 책 덕후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후회는 없다.

저희집 아이는 아들입니다. 아실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들은 딸보다 언어영역을 비롯한 발달능력이 1.5살 느립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6살이면, 옆집에 있는 4살 짜리 딸이랑 수준 내지는 언어능력이 비슷한 겁니다. 그러나 저희집 아이는 좀 다릅니다. 하도 그림책을 읽어줘서인지, 읽다가 잠들길 반복해서인지, 말이 빨리텄습니다. 지금은 말빨도 생겼습니다. 아니, 4살짜리 아이가 막대사탕을 먹기 위해 딜을 합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는 유령이다. 막대사탕을 주면 너를 안잡아가겠다.” 그러고 있습니다. 저는 막대사탕을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리도 귀여우니 줄 수 밖에요. 책을 많이 들여놨다고 해서 후회는 없습니다.



앞으로의 걱정.

이렇게 말을 잘하니 자랑할 곳은 그저 블로그밖에 없습니다. 어딜가서 “아이가 말을 참 잘하네요.”라고 들었다면, 저희 가족은 그냥 겸손을 떱니다. “하하... 제가 좀 수다스러워서...” 말끝을 흐리면 그저 그러려니들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에게 책을 엄청나게, 실로 엄청나게 읽어줍니다. 글밥이 많으면 그냥 그림만 보고 지어내서 읽어주기도 하고, 요즘엔 시대가 많이 발전해서 세이펜으로 찍어주면 구현동화도 나옵니다. CD로 참 많이 틀어줍니다.
다만 이제는 다른 또래들처럼 신나게 놀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점프가 위태롭고, 씽씽카를 타기 두려워하며, 방방이 근처도 가지 못합니다. 게다가 뽀로로를 못 봅니다. 디즈니는 더 못봅니다. 뽀로로는 항상 친구들이 싸우다가 화해하는 장면으로 화목하게 끝을 맺는데, 싸우는 것을 못 보겠고. 디즈니는 그림이 너무 화려해서 보다가 너무 피곤해 합니다. 그저 오로지 책만 볼 줄 아는 아이가 된 것입니다. 물론 시기가 지나면 스마트폰도 찾고, 게임도 하고,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신체영역이 다분히 늦은 아이를 보자하니 근심은 근심인가 봅니다.

내 책을 못보겠다.

언젠가는 칼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었습니다. 계속 읽으려던 것은 아니었고, 그냥 두껍고 시간좀 내서 읽어보자 싶어서 펼쳤던 것인데 아이가 다가왔고. 온갖 사진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드디어 별에 대한 호기심을 폭발. 지금도 어렴풋이 이야기 했던 “이 세상에 홀로 의미를 갖는 것은 없데, 왜냐면 우주는 굉장히 넓고 언젠가 누구에게 이어저 있거든.”라고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그 뜻이 뭔지 아냐고 물어보면 모르기에 “엄마와 아빠는 항상 아들과 함께 있다는 뜻이야.”라고 보기좋고 둥글게 설명하면 아이는 그저 또 배시시 웃습니다.
또 언젠가는 슬렘덩크 만화책을 보고 있는데, 옆에 기어와서는 “농구 농구”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강백호 아저씨처럼 키 클려면 브로콜리 많이 먹어야데.” 하니깐 바로 그 자리에서 브로콜리를 두 덩이나 먹었습니다. 이러다가 내가 책을 잘못잡으면 어쩌나 싶기도 한 것입니다.

암쪼록 오래오래 사랑하자. 책을.

저희집은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딱히 텔레비전이라는 기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도 그렇고 아내와 저도 그렇고, 맘만 먹으면 테블릿을 켜서 아무거나 시청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스트리밍이니까요. 그러나 텔레비전이 없어서 그런지 아이는 일단 만화보다 책입니다. 이 시절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간직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희 부부도 식당에 가면 마주 앉기보다 곁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멍하니 보는 때가 많습니다. 텔레비전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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